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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선교와 교육에 헌신한 김형모 목사

 

  1. 목사가 되기까지

     

    김형모목사님은 1906 4 4 김순권(金舜權)장로님의 아들로 전남광양군진상면지원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당시 순천은 전남의 동부 6 군의 문화중심지였기 때문에  목사님은 순천매산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여 3년간을 공부하였습니다 (1921. 4.15 - 1924. 3.10.).기독교미션스쿨을 졸업한 목사님은 선교사들의 추천에 의하여 전주신흥학교의 고등 보통과에 진학하여 3년을 수학하셨습니다(1926. 4. 1.- 30. 3. 7.). 그후 목사님은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학교 문학과에 진학하여 4년을 공부하셨습니다(1931. 4. 1.- 35. 3. 7.). 목사님은 목사가 되기 위하여 평양신학교에서 3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으셨습니다(1935. 4. 1. - 38. 3.10.).   

     

    2.일제하에서의 목회활동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전남 보성군에 있는 벌교읍교회에서 시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때였습니다. 목사님은 기독교 교리를 설교와 강해를 통하여 가르쳤으며, 우리 민족정신과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일본천황에 대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구약성경 출애급 사건등을 통하여 조국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자유 민주주의 사상과 애국애족 정신을 설교, 심방, 좌담을 통하여 가르쳤습니다.

     

    1940 1115일에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순천노회 소속 교직자 거의 전부를 검거하였는데 그중 15(목사와 전도사) 끝내 신사참배를 거부하므로 나덕환, 오석주, 박용의,김순배목사 등과 함께 순천경찰서에서 10개월간 구속유치되어 취조와 고초를 당하셨습니다(1940.11.15.~1942.9.30). 순천경찰서에서 광주법원으로 이송되어 1942 930일에 조선총독부 재판장에 의해 일본의 국체를 변혁시킨다는 죄목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습니다(1942.10.1.~1943.11.4.). 출소 후에는 금족령과 금구령이 내려졌으며 일본에서 1여년간 연금생활을 했습니다.

     

    3.양민육성을 위한 교육활동

     

    해방이 되자, 목사님께서는 남장로교 선교사 크레인 박사와 함께 매산(梅山)학교 재건에 전력을 다하셨습니다.

     

     매산학교는 미국 남장로회의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1913) 학교로, 일제치하의 한국기독교 학교들이 경험한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개교 3년만에(1916) 성경과목과 예배금지에 불복하여 데라우치 총독령에 의해 1차로 폐교되고, 그후 일시 개교되었다가 신사참배문제로 2차로 폐교되었으며(1937), 교사는 군사들의 병영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매산학교가 다시 개교된 이듬해에 2 교장에 취임하여(1947) 정년퇴임때까지(1969)  22년간 교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재건된 매산학교의 교장이된 목사님은 이미 일제치하에서 나라없는 백성의 슬픔과 의를 위한 투쟁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였기 때문에 해방조국을 위해 인간교육에 열정을 하셨습니다. 해방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목사님이 지향한 교육적 실천은 가난하고 배고픈 농민의 자녀들을 모아 그들을 격려하고,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지혜의 근원(하나님 신앙) 발견하게하고 위에 지식을 더하여 독립된 인격인이 되어 세상에서 스스로 살아갈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있었습니다. 그의 교육이념은 그가 만든 교훈에 명시되어 있습니다(信愛,知性,自治). 신애(信愛) 그리스도의 정신이요, 지성(知性) 종교적 교훈 위에 세워질 학교의 지적활동의 전부이며, 자치(自治) 독립적 인격을 뜻합니다.

        

    목사님은 1949년에 미국으로 유학하여  조오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콜럼비아 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M) 받고,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연구하였으며, 텍사스주의 어스틴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Th.D) 취득하셨습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때가 6.25동란을 끝나가는 시점으로 극도로 어려워진 학교의 운영의 정상화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공부할 기회를 잃어버린 많은 젊은이들에게 다시 공부할 있는 기회를 열어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인재가 없었던 시대에 교회세계와 대학사회의 요청을 받은 적이 여러 있었으나 그는 최고’ ‘최대’ ‘제일 남들과 같이 으뜸으로 보지않는 생활철학 때문에 시골 순천에 있는 학교의 교장으로 22년간, 순천노회 목사로서 38년간을 시무하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어떤 교육적 진가를 가지고 있는 가를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는 머리 좋은 학생들만을 위한 지식 창달의 도장이기 전에 모든 학생이 사람대접을 받으면서 교육을 받고 그들이 사회에 나가 양민으로서 살도록 인격적으로 훈련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양민육성에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4.선교를 위한 활동

     

    목사님은 학교에서 사신 22 이외에도 선교를 위한 많은 일을 맡아 하셨습니다. 교계를 위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순천노회장(1946)  49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1964) 맡으셨으며, 대전대학( 한남대학교) 이사장,광주기독병원 이사장, 전주예수병원 이사장으로서 교육과 의료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셨습니다. 매산학교를 은퇴하신 후에는 광주 호남신학교 교장으로서(1969.3.~1973.7.)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교역자를 양성하는 노력하셨습니다.        

     

    5.매산공동체와 가족

     

    매산은 하나의 가정이며 김교장님은 가장이시었습니다. 남녀 학생들, 남녀 교사들, 직원들 모두 가족이었습니다. 한날의 생활은 예배로서 시작되며, 거기엔 찬송이 있고 감사와 소망의 기도가 있으며, 그리고 말씀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못난이도 있고 잘난이도 있었지만, 일단 한가족이 매산공동체에는 동고 동락 공생 공존이 있을 뿐이였습니다. 이러한 매산가족의식이 매산공동체를 조화와 화평이 넘치게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부인 정예순여사 사이에 6남매(聖圭, 義子, 忠子, 恩圭, 惠圭, 榮圭) 있으며, 현재 3남매는 미국에 그리고 3남매는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19801231 순천시 매곡동 자택에서 숙환끝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목사님은 겸손과 온유함으로 평생을 선교와 교육에 헌신한 알의 썩어진 밀알로서 많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